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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 중심으로의 통합, 그리고 덧널무덤의 등장+

등록일
2023년 12월 25일
수정일
2023년 1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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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 중심으로의 통합 

가락국 중심으로의 통합, 그리고 덧널무덤의 등장
▶ 대성동 2호분 전경 덧널무덤은 널무덤에 비해 규모가 커지고 껴묻거리의 수가 증가하며 순장이 이뤄지곤 한다  
▶ 대성동 1호분 덧널무덤 복원 모습 덧널무덤은 구야국시대를 지나 가락국시대의 무덤으로 파악되며 강한 지도자의 권력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구산동고분군 발굴사진 가야 멸망 뒤에 조성된 굴식돌방무덤으로 신라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조성된다
ⓒ 김해 대성동고분군 발굴보고서  대성동고분군
나무로 곽을 짜고 땅을 파서 매장한 무덤을 덧널무덤[木槨墓]이라고 부른다. 또한 고고학에서는 이러한 묘제를 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라고도 부른다. 이렇게만 보면 널무덤과 덧널무덤은 언뜻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막상 직접 보게 되면 그 확연한 차이를 알 수 있다. 일단 크기에서도 차이가 나며, 무덤 속에서 발견되는 껴묻거리나 짜임새 등에서도 차이가 크다. 학계에서는 이 시점을 구야국에서 가락국으로 넘어온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국가체계를 이룬 것으로 짐작된다.
덧널무덤은 2세기 중후엽 영남지역에서 나타나는데, 대형 덧널무덤이라고 하더라도 3세기 대까지는 무덤 외부의 봉토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즉 3세기 대의 덧널무덤은 면적에 비해 깊이가 얕은 편이다. 하지만 4~5세기에 들어서는 무덤의 깊이가 매우 깊어지고 그만큼 외부의 봉토도 높아진다. 4세기 전반부터는 따로 껴묻거리를 더 넣기 위하여 부곽(副槨)이라는 시설이 등장하며, 사람을 순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5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묘광의 깊이가 3~4m정도로 다른 형식의 덧널무덤보다 현저하게 깊은 모습을 보인다.

덧널무덤에서는 각종의 토기류와 철기류, 장신구류, 의기류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어 금관가야 전성기의 문화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토기류는 29호분에서 최초의 도질토기가 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주로 항아리류가 먼저 등장한 후, 4세기가 되면서 점차 다양한 종류의 토기가 출토된다. 철기류 또한 풍부하게 출토되는데 농공구, 무기, 갑옷, 마구 등이 보인다. 특히 덩이쇠가 다량으로 출토됨으로서 <삼국지>에서 이를 화폐처럼 사용한다는 기록의 사실성 또한 확인할 수 있다.

ⓒ 대성동고분박물관 전시안내도록  대성동고분박물관

다양한 무기들과 갑옷들이 출토되는 것을 보아 이 시대에는 수많은 전쟁들이 있었음을 예상해 볼 수 있다. 특히 갑옷자료 중에서 판갑들이 다수 출토되어 고대의 갑옷과 전술체계를 연구함에 있어서 큰 자료로 활용된다. 또한 마구류들이 출토되는 것을 보아 당시 금관가야의 지배층에게는 기마를 이용하는 습속이 보편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무덤이 커진다는 것은 무덤의 축조에 많은 인원과 물품을 동원함으로서 지배자의 권력을 과시하고, 또한 사회통합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대규모 제례행사 등을 통하여 당시 지도자의 권위를 과시하였던 것이다. 영남지역에서는 3세기까지 각 지역별로 다수의 소국이 존재하였는데 3세기 후엽부터는 인접한 소국 사이에 서로간의 통합이나 연합이 이루어진다. 김해지역에서는 이를 가락국, 즉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이뤄지며 전체적인 가야제국에서도 금관가야의 권력은 이를 대표할 정도로 이른다.
강대해진 국가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권위 또한 과시할 필요가 있으며 일반인과의 차등을 두기 시작한다. 그게 고분으로 반영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내세관에 있어서도 이를 적용시켜 순장이라는 풍습이 널리 퍼지게 된다. 죽은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을 죽임으로서 저승에서도 피장자의 시중을 들 수 있도록 한 것으로서, 이는 당시 사회의 확연한 계급차이를 말해준다.

ⓒ 부경대학교박물관  구산동고분군

5세기 이후의 가야무덤을 살펴보면 이른바 구덩식돌방무덤[竪穴式石槨墓]이 주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 묘제는 당시 지배자들의 무덤이 된다. 김해지역에서는 두곡유적과 칠산동고분군, 내덕리고분군 등에서 이런 구덩식돌방무덤이 다수 확인되며, 또한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된다.

그리고 6세기 대에 들어서는 백제의 영향을 받아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과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이 등장하여 널리 퍼지며 기존의 구덩식돌방무덤과 공존하게 된다. 이러한 무덤은 김해지역에서도 여럿 보이지만, 고령이나 함안 등 주로 다른 지역에서 많이 보인다. 또한 가야가 멸망된 이후로도 굴식돌방무덤은 널리 쓰이는데 김해지역에서는 대표적으로 구산동고분군이 있다.

이처럼 가야에서는 다양한 무덤들이 있으며, 특히 김해에서는 주로 가야시대 전기에 관련이 깊은 무덤들이 많다. 그리고 이를 대성동고분군은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 보여주어 우리에게 당시 매장문화와 국가의 형성을 추측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우리는 이를 타임캡슐로 여기고 열어봄으로서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서로와 교류하는 창으로서 활용하고 있다. ㅁresearch data; 금관가야 파헤치는 타임캡슐, 고분 속으로의 여행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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