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ng Shui, Blood and Soil Resurrection, Sejangmyo, Somokbeop, Amjangbeop, Yin, Yangtaek, Gamgyeol
풍수지리, 혈토재혈, 세장묘, 소목법, 암장법, 음, 양택, 감결
ㅇ혈토,재혈 남산천심십도 건강한 씨앗으로 복제..
ㅇ사랑합니다..아름다운 산과강 그리고 우리 - 남산천심십도가 추구하는 세계는
ㅇ인간에게 있어 외적인 아름다움과 내적인 건강함을 추구하고 모든인간의 기본적인 목표인 무병장수의 꿈을 실현하는것 입니다-


진룡과 진혈은 기가 천성과 함께 결합
眞龍與眞穴 氣與天星合
地穴應天星 天星照地穴
上下總同度 形象無差別
진룡과 진혈은 기가 천성과 함께 결합 되었으며
지혈은 천성에 조응하고 천성은 지혈에 조응하여
천상의 성수와 지상의 형체는 법도가 같으니
상하형상의 차별이 없다..
地穴應天星 天星照地穴
上下總同度 形象無差別
진룡과 진혈은 기가 천성과 함께 결합 되었으며
지혈은 천성에 조응하고 천성은 지혈에 조응하여
천상의 성수와 지상의 형체는 법도가 같으니
상하형상의 차별이 없다..

풍수지리.재혈 .진혈처 .혈토 (穴土)
혈토 시리즈
산의 표면을 덮고있는 흙을 걷어내면 돌도 흙도 아닌 상태가 나오는데, 보기에는 돌 같으나 만지면 흙처럼 곧게 바스러진다. 바로 생기가 응집되거나 흘러가는 통로로 홍황자윤(紅黃滋潤)해야 좋다.
산의 표면을 덮고있는 흙을 걷어내면 돌도 흙도 아닌 상태가 나오는데, 보기에는 돌 같으나 만지면 흙처럼 곧게 바스러진다. 바로 생기가 응집되거나 흘러가는 통로로 홍황자윤(紅黃滋潤)해야 좋다.

풍수지리..충청남도 예산일원 간산 일정
풍수지리..충청남도 예산일원 간산 일정
조익 [1579~1655]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포저집(浦渚集)》,《서경천설(書經淺說)》 본관 풍양. 자 비경. 호 포저·존재. 시호 문효. 음보로 정포만호가 되고, 1598년(선조 31) 압운관으로 미곡 23만 석을 잘 운반하여 표리를 하사받고, 160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친 뒤 1611년(광해군 3) 수찬으로 있을 때 이황 등의 문묘종사를 반대한 정인홍을 탄핵하다 고산도찰방으로 좌천, 이듬해 사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기용되고, 1625년(인조 3) 부호군·형조참의를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충남 예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6세 때부터 큰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11세 때 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3·1운동 후 일본식 교육을 받기 싫어 중퇴하였다. 19세 때 길에서 글을 몰라 아버지의 무덤을 못 찾는 무식한 청년을 보고,자기 집 사랑방에서 야학을 열어 농민들을 가르쳤다. 22세 때에는 월진회를 조직하여 청소년들에게 애국심을 심어 주고 근면과 협동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였다. 그 뒤 김구의 특명을 받아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 생일 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최고 사령관 시라카와를 비롯하여 상하이 일본 거류민단장 등을 죽이고 노무라 등 많은 일본군에게 부상을 입혔다.이 소식을 들은 중국의 장 제스는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 사람의 조선인이 해냈다' 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뒤 오사카 군법 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했다. 1962 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주어졌다
조익 [1579~1655]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포저집(浦渚集)》,《서경천설(書經淺說)》 본관 풍양. 자 비경. 호 포저·존재. 시호 문효. 음보로 정포만호가 되고, 1598년(선조 31) 압운관으로 미곡 23만 석을 잘 운반하여 표리를 하사받고, 160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친 뒤 1611년(광해군 3) 수찬으로 있을 때 이황 등의 문묘종사를 반대한 정인홍을 탄핵하다 고산도찰방으로 좌천, 이듬해 사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기용되고, 1625년(인조 3) 부호군·형조참의를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서 달아난 죄로 처벌받은 뒤 1643년 재기용되어 원손보양관이 되었다. 이조·예조의 판서, 대사헌이 되고, 1648년 좌참찬으로 승진,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으로 인조의 행장찬집청찬집관을 겸한 후 좌의정에 올랐다.
그 해 이이·성혼의 문묘종사를 상소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사직하였다. 김육의 대동법 시행을 적극 주장하였고, 성리학의 대가로서 예학에 밝았으며, 음률·병법·복서에도 능하였다. 개성의 숭양서원, 광주의 명고서원, 신창의 도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포저집》 《서경천설》 《역상개략》 등이 있다.
조익 [1579~1655]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포저집(浦渚集)》,《서경천설(書經淺說)》 본관 풍양. 자 비경. 호 포저·존재. 시호 문효. 음보로 정포만호가 되고, 1598년(선조 31) 압운관으로 미곡 23만 석을 잘 운반하여 표리를 하사받고, 160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친 뒤 1611년(광해군 3) 수찬으로 있을 때 이황 등의 문묘종사를 반대한 정인홍을 탄핵하다 고산도찰방으로 좌천, 이듬해 사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기용되고, 1625년(인조 3) 부호군·형조참의를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충남 예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6세 때부터 큰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11세 때 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3·1운동 후 일본식 교육을 받기 싫어 중퇴하였다. 19세 때 길에서 글을 몰라 아버지의 무덤을 못 찾는 무식한 청년을 보고,자기 집 사랑방에서 야학을 열어 농민들을 가르쳤다. 22세 때에는 월진회를 조직하여 청소년들에게 애국심을 심어 주고 근면과 협동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였다. 그 뒤 김구의 특명을 받아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 생일 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최고 사령관 시라카와를 비롯하여 상하이 일본 거류민단장 등을 죽이고 노무라 등 많은 일본군에게 부상을 입혔다.이 소식을 들은 중국의 장 제스는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 사람의 조선인이 해냈다' 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뒤 오사카 군법 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했다. 1962 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주어졌다
조익 [1579~1655]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포저집(浦渚集)》,《서경천설(書經淺說)》 본관 풍양. 자 비경. 호 포저·존재. 시호 문효. 음보로 정포만호가 되고, 1598년(선조 31) 압운관으로 미곡 23만 석을 잘 운반하여 표리를 하사받고, 160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친 뒤 1611년(광해군 3) 수찬으로 있을 때 이황 등의 문묘종사를 반대한 정인홍을 탄핵하다 고산도찰방으로 좌천, 이듬해 사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재기용되고, 1625년(인조 3) 부호군·형조참의를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서 달아난 죄로 처벌받은 뒤 1643년 재기용되어 원손보양관이 되었다. 이조·예조의 판서, 대사헌이 되고, 1648년 좌참찬으로 승진,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으로 인조의 행장찬집청찬집관을 겸한 후 좌의정에 올랐다.
그 해 이이·성혼의 문묘종사를 상소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사직하였다. 김육의 대동법 시행을 적극 주장하였고, 성리학의 대가로서 예학에 밝았으며, 음률·병법·복서에도 능하였다. 개성의 숭양서원, 광주의 명고서원, 신창의 도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포저집》 《서경천설》 《역상개략》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