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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의 전신(前身)

관가야의 전신(前身), 구야국의 주요무덤인 널무덤
▲ 주변 제 Ⅲ지구 1호분 전경 창원 다호리 1호분처럼 대성동 1호분에서도 나무로 된 널의 흔적이 나타났다
▲ 구지로 12호 널무덤 복원 모습 당시 김해지역의 일반적인 널무덤의 복원 모습이다.
ⓒ 김해 대성동고분군 발굴보고서 대성동고분군
나무로 관을 짜고 땅을 파서 매장한 무덤을 고고학에서는 널무덤[木棺墓]이라고 하며 토광목관묘(土壙木棺墓)라고도 부른다. 이러한 무덤은 가야지역에서 널리 쓰인 묘제(墓制)로서 영남지역에서는 주로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사용되었다. 대성동고분군에서는 모두 34기가 조사되었는데 대체로 표고 9m 이하의 평지나 거의 평지에 가까운 곳에 조성되었다. 1~2세기 대에 만들어진 것이 많고, 관은 굵은 통나무나 각재를 사용하여서 만드는데, 그동안은 오늘날의 관처럼 판자를 이용하여 만들었을 것이라 추측하였다.
하지만 창원 다호리유적에서 발견된 다호리 1호분이, 통나무로 된 구유모양으로 발견되고 나서부턴 이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그동안 단순히 판자로만 만들었을 거라는 인식과는 달리하게 되었으며 유구의 조사에 있어서도 이를 염두하고 발굴에 임하게 되었다.
ⓒ 대성동고분박물관 전시안내도록 구지로 12호분
널무덤을 발굴해보면 주로 평면이 ‘ㅍ’자 모양이고 단면이 ‘ㅂ’자 모양으로 3㎝정도의 두께로 된 판자를 결구시켜서 관을 만든 게 많다. 관 안에는 주로 몸에 지니는 장신구만 넣고, 다른 껴묻거리들은 관 밑의 부장구덩이[腰坑]나 관 밖의 뒷채움흙[充塡土], 혹은 관 위에 두는 경우가 많다.
무덤 내의 껴묻거리를 살펴보면 피장자의 신분에 따라 질과 양에서 개인 사이에 큰 차이가 있고 집단 사이에서도 차이가 심하다. 하지만 무덤의 규모나 입지에서는 계층이나 집단차이가 그다지 많이 보이진 않는다. 출토되는 유물은 각종 토기나 철기, 칠기,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와질토기가 대부분이며 철기는 무기와 농공구들이 출토되었다. 또한 장신구는 청색의 유리구슬로 만든 목걸이나 팔찌가 출토되었다.
<삼국지>에 보면 주수(主帥)와 천군(天君)의 존재가 보인다. 당시 구야국을 비롯한 변한의 지도자들은 바로 이 주수와 천군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각각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유적 상으로는 당시의 여러 무덤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 아직까지 강한 권력을 가진 통치자의 모습을 보이기엔 한계가 있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덧널무덤이 조영되는 3세기 이후부터는 이러한 양상도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ㅁresearch data; 금관가야 파헤치는 타임캡슐, 고분 속으로의 여행 – 오마이뉴스